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시야마 전투 (문단 편집) === 텐노지 전투, 제1차 키즈가와 해전 === 텐쇼 4년(1576년) 봄, 켄뇨는 모리 테루모토에게 보호를 받던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만나 3번째로 거병을 했다. 노부나가는 4월 14일, [[아케치 미츠히데]] 에게 명해 이시야마혼가지를 3방향에서 포위했다. 허나 포위되었어도 키즈(木津, 오늘날 오사카의 나니와 구)와 오간(楼岸, 오늘날 오사카시 츄오구)을 통해 해상에서 물자를 공급받고 있었고, 오다측에서 키즈를 공격하자 역으로 1만 이상의 대군을 풀어 오다군을 격퇴하고 텐노지 요새까지 쳐들어왔다. (이 때 포위군의 대장인 한 나오마사가 전사했다) 위기를 느낀 미츠히데는 요새에 틀어박혀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이 소식을 듣고 노부나가는 즉시 병사를 모았으나, 워낙 갑작스럽게 실시한 징병이라 병사들의 집결이 늦었다. 기다리다 지친 노부나가는 일단 3천명만 동원해 요새를 포위하던 1만 5천명의 혼간지 군에게 싸움을 걸어 포위를 돌파하고 요새의 아케치 군과 합류하여 격퇴전에 나선다. 한창 농성전을 준비하던 혼간지군은 헛걸음 친 격이 되었고 즉시 후퇴한다. (텐노지 전투) 이후 노부나가는 포위군 대장으로 사쿠마 노부모리를 임명하고 이시야마혼간지를 완전히 포위했다. 경제적으로 봉쇄를 당한 혼간지 세력은 모리측에 구원을 요청했고, 모리 가문은 이에 응하여 무라카미 수군 등 자세력의 수군 700~800척(실제로는 600척 정도로 본다)를 동원하여 물자를 싣고 나타났다. 이에 노부나가 측은 구키수군 등 300척을 동원해 봉쇄를 감행했으나 숫자에서 앞섰던 모리측이 화공으로 배를 불태워서 대승리를 거둔다. (제1차 키즈가와 해전) 노부나가는 어쩔 수 없이 일단 삼면의 포위만 강화하고 병사를 철수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